존엄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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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존엄한 죽음
  • 입력 : 2014. 05.16(금) 00:00


지난 1997년 보라매 병원에서 치료중인 환자를 부인이 경제적인 이유 등을 들어 퇴원을 요구했고, 의료진은 치료중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부인의 끈질긴 청으로 인해 서약서를 받고 퇴원을 시켰다. 인공호흡기 치료 중이던 환자는 퇴원 후 사망했고 이를 문제 삼은 환자의 또 다른 친척들에 의해 부인과 의료진들이 고소되어 최종적으로 의료진까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것이 '보라매 병원 사건'이다.

지난 2008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있던 환자의 가족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병원이 거부했고 이에 환자 측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존엄한 죽음을 허락하는 법원의 최종판결이 이루어졌고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가 제거됐다. 이것이 '김OO할머니 사건'인데 인공호흡기가 제거된 할머니는 200일 후에야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은 인공호흡기 없이도 호흡할 수 있는 환자였다는 것이고 존엄사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찌됐든 존엄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고 이를 계기로 '존엄사법'이 만들어져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존엄사의 법적 뒷받침은 없고 의료진들은 보라매 병원 사건만이 주로 인식돼 있다.

그렇다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모든 보호자들이 요구하고 동의하면 서약서를 받고 퇴원시켜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사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혹시라도 고소당할지 모르는 위험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사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환자가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치료 말기에 이르게 됐을 때 보호자들의 반응도 극과 극을 보이고 다양한 경우들을 보게 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보라매 병원의 경우와 같이 아직 치료중인 환자까지도 치료를 거부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보호자들도 보게 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판단해야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도 그 결정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심정지후 소생은 됐으나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의 경우 예후가 극히 불량할 것으로 판단돼도 아주 작은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치료를 해야 하는데 보호자들이 치료를 포기하기를 원하는 경우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난감하곤하다.

의사들은 의료사고와 소송을 매우 두려워한다. 이러한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최선을 다한 의료행위에서도 의료사고는 발생한다. 하물며 내 스스로 의료사고의 가능성이 있는 선택을 할리는 없다. 그래서 보라매 병원 판결이후 중환자실로 입원된 환자가 퇴실하는 경우는 좋아져서 병실로 가든지 사망을 하는 경우뿐인 것이 현실이 됐다. 병원에서는 사망하기 전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필자 역시 20년 전에 아버지의 임종을 집에서 지켜보았고, 개인적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서 죽기보다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에 편하게 임종을 맞이하고 싶다.

나의 바람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설문조사를 본적이 있다. 하지만 존엄사법이 제정된다고 이러한 문제와 갈등이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보호자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무조건 반대하는 것 보다는 존엄사가 남발, 회생할 수도 있는 환자가 포기되거나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염려해서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법률적 뒷받침은 된다 하더라도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회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 차이와 이해관계에 의해 의료진과 보호자들의 갈등은 지금보다 개선될지는 몰라도 갈등은 계속될 것이고 법적 분쟁도 생길 수 있다.

존엄사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법률의 제정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 이러한 임종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중환자실에서 기관내삽관이 되어있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서 연명하다가, 어느 순간 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몇 번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사망판정을 하는 현재의 실상을 그냥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죽는 방법에 대한 나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주장할 것인지를. 존엄사법 법률 초안에도 본인의 평소 의지가 반영되게끔 되어있기도 하다.

최근 미국에서 제작된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일반 병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단채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병원에서도 환자와 보호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형태의 임종이 가능하도록 의료 환경이 제공됐으면 좋겠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을 위해서도 도울 수 있는 복지제도나 사회안전망이 구축됐으면 좋겠다. 의사들도 보라매 병원 판결을 엄격하게 적용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의미 없는 연명치료라고 판단되면 보호자들과 상의하여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서로의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

조수형 조선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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